[최재군 칼럼] 봄의 전령사 수원 개나리(連翹) 이야기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6
1. 겨울의 침묵을 깨는 노란 함성 겨울의 완고한 침묵을 가장 먼저 깨뜨리는 것은 대지의 낮은 속삭임이 아니라, 황금빛 꽃을 피워내는 개나리의 찬란한 함성이다. 잎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는 우리가 봄을 맞이할 채비를 마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계절이 당도했음을 선언하는 진정한 전령사이다. 희망과 기대, 그리고 깊은 정(情)이라는 꽃말처럼, 삭막한 겨울의 잔해 속에서 조건 없이 피어난 샛노란 꽃잎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을 심어준다. 특히 개나리는 한국 특산종(Forsythia koreana)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척박한 땅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강인함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우리네 끈질긴 생명력을 그대로 닮아 있다.
2. 민초의 삶과 함께한 치유의 꽃 개나리는 단순한 관상용 꽃을 넘어,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의 척박한 삶을 실질적으로 지탱해 온 소중한 자원이었다. 역사적 기록 속 개나리는 화려한 풍류의 소재로 주목받기보다는, 민초들의 곁을 지키며 약재와 음식으로 활용된 생존의 동반자에 더 가까웠다. 과거 문헌에서 개나리는 주로 연교(連翹)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개나리 열매를 서늘한 성질을 가진 약재로 분류하여, 몸 안의 열독을 풀고 종기와 염증을 치료하는 성약(聖藥)으로 다루었다. 이는 현대 의학의 항균 및 소염 작용과도 맥을 같이하며, 한·중·일 동양 삼국 모두에서 그 효능을 인정받아온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개나리는 생활 속 맛과 지혜의 소재였다. 이른 봄 돋아나는 개나리 새순은 나물로 무쳐 먹으며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을 보충하는 구황 식물의 역할을 했고, 봄철 꽃으로 빚은 개나리술은 그윽한 향과 함께 미용과 건강을 돕는 보약으로 사랑받았다. 이처럼 개나리는 사대부의 고고한 풍류보다는 우리 민족의 고단한 삶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달래주던 진정으로 친숙한 동반자였다.
3. 수원의 개나리 수원골드(Suwon Gold) 수원은 개나리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도시다. 그 역사는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대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18년(1794년) 수원화성 축성이 한창이던 시절 정조는 극심한 두통과 종기에 시달렸다. 이때 내의원에서 올린 처방이 바로 개나리 열매가 주재료인 가미연교음(加味連翹飮)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느라 몸속에 쌓인 화기와 열을 식혀준 것이 바로 산천에 피어난 개나리였던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바탕 위에 오늘날 수원은 개나리의 새로운 진화를 이끌고 있다. 수원의 이름을 딴 수원골드(Suwon Gold) 품종은 일반 개나리보다 꽃이 크고 황금빛이 더욱 선명하며, 꽃이 진 뒤에도 잎이 황금색을 유지하여 정원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수원 영흥수목원에는 수원골드와 일반 개나리를 도입한 토피어리 정원이 조성되어 개화 시즌마다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유연한 가지를 활용해 만들어진 예술적 형상들은 개나리가 단순한 울타리용 나무를 넘어 수준 높은 정원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4. 천덕꾸러기 개나리의 화려한 변신 그동안 개나리는 너무 흔하다는 이유와 관리의 부재 탓에 종종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천 제방길에 너무 가깝게 심겨 보행을 방해하거나, 무분별한 전정으로 꽃도 피우지 못한 채 몽당빗자루처럼 방치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주변의 개나리는 대부분 꺾꽂이로 번식된 복제묘인 데다, 암술과 수술의 길이가 다른 장주화와 단주화를 섞어 심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임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개나리의 식물학적 가치를 재조명한다면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우선 개나리는 비탈면 녹화와 사면 안정을 위한 핵심 자원이다. 맹아력이 강하고 줄기가 땅에 닿기만 해도 뿌리를 내리는 특성은 토사 유출을 방지하는 천연 그물망 역할을 수행한다. 삭막한 콘크리트 옹벽을 개나리로 덮는다면 구조물의 안전을 확보함은 물론, 매년 봄 거대한 황금 꽃벽을 선사하는 압도적인 경관 개선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보행 환경을 고려한 전략적 식재가 병행되어야 하며, 수원골드(Suwon Gold)처럼 수형이 수려한 품종을 선택해 시민의 불편은 줄이고 볼거리는 극대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 수원의 전령사가 전하는 문학적 서사 개나리는 수원의 역사와 현대 기술, 시민의 정서가 응축된 식물이다. 이제 개나리는 수원의 정체성을 담은 핵심 브랜드이자 도시 마케팅의 전령사로 거듭나야 한다. 정조대왕의 치유 정신을 담은 스토리텔링을 강화하고, 성곽의 무채색과 대비되는 노란빛을 시각화하여 수원화성의 봄을 브랜드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도시 개발지의 비탈면에 수원골드(Suwon Gold)를 집중적으로 식재하여 삭막한 사면을 황금빛 진입로라는 명소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한국 특산종이자 수원의 역사와 함께한 개나리가 황금빛 물결로 넘실댈 때, 수원은 비로소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정원 도시로 완성될 것이다. 개나리가 전하는 희망의 언어가 수원의 모든 골목에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프로필 - 수원특례시 공원녹지사업소장 - 조경기술사 - 자연환경관리기술사 -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 문화재수리기술자(식물) - 나무의사, 수목보호기술자 - 경기도시공사 기술자문위원 - 조달청 평가위원 - 왕의정원 수원화성(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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