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칼럼] 수원과 정조의 대추나무 이야기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3
우리 민족에게는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는 자연주의 사상이 있다. 마을마다 정자나무와 서낭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마을과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곤 했다. 지금은 오래된 정자나무와 서낭나무를 보호수나 자연유산으로 지정하여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나무는 사람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자원이자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수원에는 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배나무가 많은 이목동, 밤나무밭이 많은 율전동, 대추나무가 많아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는 조원동, 그리고 소나무가 많은 송죽동 등이 있다. 대추나무골 조원동의 한자는 棗園(조원)으로 대추나무 조(棗)와 정원과 마을의 동산을 의미하는 원(園)이 합쳐진 이름이다. 이를 풀이하면 ‘대추나무 정원’ 또는 ‘대추나무 동산’이 된다. 대추나무 열매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중요한 과일이다. 과일을 차례상에 차리는 원칙 중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가 있다. 홍동백서는 동쪽에 붉은 과일, 서쪽에 흰 과일을 놓는다는 의미다. 조율이시는 대추, 밤, 배, 감 등의 배열 순서를 말한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 임금을 뜻하니 처음에 놓고, 밤은 한 송이에 세 개가 들어 있어 삼정승을 뜻하여 두 번째 놓고, 배와 사과는 씨가 여섯 개로 육조 판서(判書)를 뜻하니 세 번째 놓고, 감은 씨가 여덟 개라 팔도 관찰사를 의미하여 네 번째 놓으라는 의미다.
대추는 중요한 한약재 중 하나로, 감초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다. 한의학에서는 '강삼조이(薑三棗二)'라는 조제법이 있는데, 이는 한약 한 첩에 생강 3쪽과 대추 2개를 넣는다는 뜻이다. 생강과 대추는 함께 사용될 때 여러 약재를 조화롭게 하고 부작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대추의 효능에 대한 기록이 다수 있다.
오장을 보하고 달여서 마시면 좋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속을 편하게 하고 비장(脾, 지라)을 건강하게 하며 --- 중략 --- 또한 의지를 강하게 하고 온갖 약을 조화시킨다. 대추나무 잎은 가루 내어 복용하면 살이 빠지고 즙을 짜서 땀띠에 문지르면 좋다. - 동의보감 중에서
수원의 조원동 지역은 장안구 수원야구장과 한일타운 일원이다. 현재는 도시화로 과거 흔적을 찾기 어렵다. 조원동 지명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이 마을 집집마다 대추나무가 많아 대추골이라 했고 행정구역을 구획하며 조원동으로 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현재의 융릉(현륭원)으로 옮기고 아버지 제사에 사용하게 될 대추를 마련하기 위해 풍토가 좋고 풍수적으로 명당인 현재의 조원동 지역에 대추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고 이후 대추나무골로 불리게 된다는 설이다. 과학적으로 확인한 사항은 아니나 둘 다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 지금도 조원동 주민들은 역사성을 이어가기 위해 조원공원에 대추나무를 심고 관리하고 있다.
수원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에게는 경희궁의 대추나무와 관련된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煕宮志)에는 ‘경희궁에 대추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말을 매어두는 계마(繫馬)라 불렀다. 한 그루는 흥정당 서쪽의 통양문(通陽門) 안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흥정당 동쪽의 흥태문(興泰門) 안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흥태문은 정조가 세손 시절 거처하던 존현각의 옆문이며, 흥태문 안의 대추나무 있던 자리는 존현각의 안마당이다.
조선시대 ‘왕의 일기’로 알려진 일성록에는 정조와 관련된 대추나무 이야기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경희궁은 원래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친아버지 원종(元宗, 1580∼1619)의 집이었다. 원종은 손수 한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고 조석으로 사랑하여 구경하며 때로는 말을 매고 이름하기를 계마수(繫馬樹)라 하였다. 원종의 집에는 또 다른 상서로운 바위가 있는데 왕의 기운 있다고 전해져 왕암(王巖)이라 불렀다. 광해군은 즉위 후 바위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집을 빼앗아 1671년 경희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자신이 건설한 경희궁에 머물지 못하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를 거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죽게 된다.
경희궁 대추나무 계마수조(繫馬樹棗)는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하며 2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역사에 등장한다. 계마수조는 1600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후 죽었다가 1661년에 다시 살아나고 이때 숙종이 태어났다. 이후 다시 죽었다가 1721년에 또다시 살아났고, 같은 해에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역사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을 예고하듯이 대추나무는 되살아났다. 1782년, 정조 연간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그 해에 경희궁의 대추나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조가 오랫동안 바라던 아들 문효세자의 탄생과 함께 일어난 사건이다. 또한, 그 해에 대추가 풍년이 들어 십여 두(斗)나 되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정조는 수확한 대추를 신하들과 함께 나누며 기쁨을 함께했다.
100년 가까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다니,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상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뿌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줄기가 자라나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한다. 정조는 경희궁의 대추나무에 특별한 애착을 보였다. 이 나무가 되살아난 것과 동시에 그토록 원하던 아들 문효세자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상서로운 일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정조가 현재의 조원동에 대추나무를 심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많은 종류의 과일나무들은 해거리 현상으로 인해 격년으로 열매가 결실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대추나무와 감나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과일나무들이 열매를 맺지 않을 때, 옛 문헌에는 이를 해결하는 비법이 전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가수법(嫁樹法), 즉 '과일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산림경제에 과일나무 시집보내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정월(음력 1월) 초하루나 대보름, 혹은 그믐날 해가 뜨기 전에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주워 과일나무 줄기와 가지 사이에 끼워두는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 연간에 의관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소나 말에게 땅을 밟게 하여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정월 초하루 해가 뜰 때 도끼 등으로 대추나무를 여기저기 친다. 이것을 대추나무 시집보낸다고 한다. 나무를 쳐주지 않으면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나무를 베어주면 열매가 시들어 떨어진다.’ - 산가요록 중에서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방법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잎 또는 줄기의 영양 성장보다는 종족 번식을 위해 꽃을 많이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일반적인 수목의 생리적 현상이다. 선조들은 이러한 원리를 활용하여 나무에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열매를 맺도록 유도했다. 지금도 대추나무나 감나무의 시집보내는 방법은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실제 생활에 적용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벽조목(霹棗木)이라 한다. 민간에서 대추나무는 양의 기운이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벽조목은 벼락에 의해 양의 기운이 더해진 것이고 양기가 최고가 된다. 그런 이유로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귀신을 쫓아 주어 귀하게 여겼다. 현재도 벽조목은 도장이나 염주를 만드는데도 귀한 대접을 받고 화(禍)를 멀리하고 복(福)을 부르는 부적으로 인기가 높다.
대추나무는 우리 생활과 함께하는 수목이다. 열매는 제사상에 오르고 음식에 들어가며 한약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재료다. 어느 동네든 시골집 담장 부근에 한두 그루 정도는 있는 과일나무다. 수원에서 대추나무는 조원동의 상징 수목이며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 임금과 관련이 깊은 나무다. 조원동에 대추나무가 많아지고 정조의 계마수조 신비한 이야기가 후손에게 오래도록 전해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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