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칼럼] 사도세자와 정조의 느티나무 이야기

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

최재군 | 기사입력 2024/11/29 [14:45]

[최재군 칼럼] 사도세자와 정조의 느티나무 이야기

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

최재군 | 입력 : 2024/11/29 [14:45]

▲ 화산 최재군     ©수원화성신문

 

화성행궁은 세계유산 수원화성의 팔달산 아래에 동향하며 자리한다. 정문인 이층집 신풍루 앞마당에는 3그루의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들 느티나무 나이는 대략 400년 전후로 성인 가슴 높이 둘레가 3.8m에 이른다. 현재는 역사적 가치가 높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신풍루 앞 느티나무 3그루는 정승나무라 한다. 이는 기원전 중국 주나라 시대 예법과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에 ‘궁궐의 외조(外朝)에 삼괴(三槐)를 심어 삼정승이 자리하게 한다.’라는 고사와 관련된다. 외조는 궁궐의 전면에 배치하는 주요 관공서가 자리하는 공간이며 삼괴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 또는 회화나무로 삼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상징한다. 한자 삼괴(三槐)에서 괴(槐)는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로 쓰인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안 마당 외조 공간에도 나이가 300~400년 되는 정승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로 총 8주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화성행궁의 정승나무와는 위치와 형식이 다르게 식재되어있다.

 

화성행궁 정승나무는 격식 있게 자리를 잡았다. 3그루가 품(品) 자 형태로 신풍루 정면을 마주 보고 우측에 1그루 좌측에 2그루다. 마치 삼정승이 신풍루에 자리 잡은 정조대왕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품(品) 자형 3점 식재 정승나무는 국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경복궁이나 창덕궁, 남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에도 없는 것이다.

 

▲ 2007년 정승나무 모습     ©수원화성신문

 

▲ 2018년 진단 사진     ©수원화성신문

 

정조대왕은 왜 느티나무 3그루를 심었을까?

 

정답은 화성행궁의 지위에서 찾을 수 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현재 서울시립대 주변에 묻혀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영우원을 현재의 화성시 융릉 자리로 옮겨 조성하며 그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수원화성으로 이주시키며 건설된 성곽이다. 궁궐 양식으로 건설된 화성행궁은 삼문삼조(三門三朝) 원칙을 따랐다. 즉 임금이 정사를 보는 봉수당이 중심이 되며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공간 구성은 신하들이 업무를 보는 궁궐 전면의 외조, 임금이 정치를 하는 봉수당 권역의 치조, 임금의 가족이 생활하는 연조 순으로 배치되었다. 정승나무는 이중 외조 공간 신풍루 주변에 심는 나무다.

 

특히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상왕이 되어 수원에서 살아가려고 건설한 궁전이다. 아들 순조가 성인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넘겨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내려와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돌보며 살고자 했다. 이것이 갑자년 구상이다. 수원화성은 다른 행궁과 다른 상왕이 거처하기 위해 건설된 상왕 궁전이다. 그래서 신풍루 앞 정승나무는 격식이 있고 삼정승을 상징하는 특별한 느티나무로 정조대왕이 심은 것이다.

 

정승나무와 연관된 또 다른 사연이 있다. 경진년(1760년) 부친 영조와 불화로 광증, 의대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온양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누이동생 화완옹주을 통해 아버지를 설득했다. 다행히 영조의 윤허를 받은 사도세자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피해 서인들이 드나드는 선인문을 나서 온양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상황이 불안하여 정문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누이동생의 힘을 빌려 얻은 기회로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도세자는 답답한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선인문 앞에는 이로부터 2년 후 뒤주에 갇혀 죽는 사도세자를 지켜보던 비운의 회화나무가 현재까지 처량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온양 여행은 무더운 한여름 7월 18일부터 16일간 이루어졌다. 온양으로 가는 도중에는 화성시 독산성에 올라 백성들을 살피고 세자로서 위엄을 보여주었다. 온양행궁에 당도한 사도세자는 마음에 평화를 찾고 무술을 연마한다. 행궁 서쪽 담장 한편에 사대를 세우게 하고 활 쏘는 연습을 하게 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고을 수령이던 윤염에게 느티나무 3그루를 심도록 했다. 한여름에 그늘이 없자 3그루의 느티나무를 품(品) 자 형식으로 격식 있게 심은 것이다.

 

▲ 영괴대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수원화성신문

 

30년이 지난 1790년, 29세의 젊은 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2월 29일에 한림소시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예문관 검열이라는 직책에 혼자 임명되었다. 예문관 검열은 왕의 명령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를 시기하던 정적들이 다산을 음해하자 다산은 정조의 지시를 무시하고 직무를 거부하게 된다. 다산이 여러 차례 어명을 거부하자 정조는 왕명을 어긴 죄로 다산을 3월 8일에 해미로 유배 보낸다. 11일이 지난 후 정조는 다산을 용서하고 다시 관직에 등용하기 위해 유배를 풀어주어 한양으로 올라오도록 했다.

 

여행이나 다름없는 짧은 유배를 마친 다산은 피부병인 옴을 앓고 있어 이를 치료하기 위해 한양으로 떠나기 전 온양에 들르게 된다. 그리고 고을 사람들로부터 30년 전 사도세자가 심은 느티나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산은 칡덩굴이며 환삼덩굴이 뒤덮은 전혀 관리하지 않는 느티나무를 살펴보고 가슴 아파하며 관리자를 불러 당장 손보게 했다. 그러면서 장차 한양에 올라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사도세자 행적이 기념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온천 행궁 안에 홰나무 한 그루가-

 

다산 정약용

 

오랜 세월 잡초에 매몰되어 묵히었네

오이덩굴 새삼 덩굴 칭칭 서로 감기어

 

중략

 

아, 이 나무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건고

여보게들 행여나 자르거나 휘지 마소

내 장차 돌아가서 임금에게 아뢴 뒤엔

이 나무 천년토록 길이 존귀하고 지고

 

다산이 이때의 일을 정조에게 보고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꼼꼼한 성격의 다산은 분명 정조에게 보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고을 수령이 경진년에 사도세자 일을 정조에게 보고한 것으로 쓰여있다. 어찌 되었든 온양행궁에서 사도세자 일을 보고 받은 정조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느티나무 주변에 화단을 조성하고 영괴대(靈槐臺) 비석을 세우게 했다. 이때는 사도세자 부부가 환갑이 되는 1795년이며 수원화성의 건설이 한창이었다.

 

비석의 영괴대 글자는 정조의 필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사도세자가 심은 온양행궁 품(品) 자형 3그루의 느티나무를 기념하고 궁궐 법식에 따라 화성행궁 외조 공간에 정승나무 3그루를 심은 것이다. 이는 기념비를 세우게 한 시기와 수원화성 건설이 진행되던 때와 같은 기간이며 영괴대와 화성행궁 느티나무의 식재 형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산시 온양행궁의 영괴대 느티나무는 아쉽게도 2007년에 3그루 모두 고사하였다. 260년 동안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던 느티나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는 영괴대 비석과 비각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가쿠슈인 대학교 소장(정승나무 전경)     ©수원화성신문

 

화성행궁 정승나무 후계목을 온양행궁에 심어보자

 

화성행궁 정승나무는 1800년 정조 승하 이후 모진 세월을 지켜봤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가 통치하던 시절 화성행궁은 ‘수원자혜의원’으로 이용되며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1989년 화성행궁의 복원이 시작되기까지 화성행궁은 수원의료원, 여성회관, 경찰서 등이 자리하였다. 다행히 2024년에 화성행궁은 온전히 복원되며 정체성을 되찾았다. 일제강점기 훼손된 지 119년 만에 완전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화성행궁의 복원 사업이 시작된 지 35년 만의 일이다.

 

현재의 정승나무는 매우 아프다. 최근까지 행궁의 정문 앞마당은 많은 관람객으로 토양이 답압 되어 뿌리가 호흡하기 어렵게 되었고 나무의 크기는 몰라보게 작아졌다. 일부 가지는 고사하여 잘렸고 줄기 속은 썩어가고 있다. 정승나무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나무가 아프다고 영양제만 공급하면 안 된다. 뿌리 환경부터 개선되어야 한다. 학술 가치가 크고 역사상 유일한 품(品) 자 형태를 보여주는 정승나무가 힘들어하고 있다. 혹시 죽을지 모르니 후계목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후계목을 온양행궁 영괴대에 심을 수 있도록 하면 의미 있는 일이 된다.

 

느티나무는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오래전부터 조경수로 심었고 공원과 녹지에 심는 나무다. 현재도 시골에는 느티나무 정자나무가 많다.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며 주민들의 소통을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주민들은 정자나무를 신성시하며 숭배해 왔다. 정월 보름날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동제를 지냈다. 수원에서도 느티나무에 동제를 지내는 지역이 있다. 영통의 단오어린이공원 느티나무는 단옷날에 지역 주민이 동제를 지냈고 매탄동 산드래미 느티나무 역시 동제를 지냈다. 안타깝게도 두 곳의 보호수 느티나무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2018년과 2021년에 각각 고사하였다. 화성행궁 정승나무와 수원시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후손들에게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전해줄 수 있도록 많은 시민이 사랑을 주고 관심 가져 주시길 기원한다.

 

프로필

- 수원특례시 공원녹지사업소 수목원 과장

- 조경기술사

- 자연환경관리기술사

-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 문화재수리기술자(식물)

- 나무의사, 수목보호기술자

- 경기도시공사 기술자문위원

- 조달청 평가위원

- 왕의정원 수원화성(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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