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신 음악칼럼]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

김명신 | 기사입력 2024/11/28 [10:37]

[김명신 음악칼럼]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

김명신 | 입력 : 2024/11/28 [10:37]

▲ 김명신 수원시음악협회 회장   ©수원화성신문

 

수많은 클래식 음악가 중에 ‘스펙타클(spectacle)’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를 빼놓을 수가 없겠다. 그는 헝가리의 ‘라이딩’이라는 시골 작은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9세 때에는 연주회를 개최할 정도로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이후 빈으로 가서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살리에리에게 작곡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6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생계를 위해 파리에 거주하면서 레슨을 시작하였으며, 몇 년 후에는 당시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파리의 사교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다양한 상류사회의 인사들을 비롯하여 쇼팽, 슈만, 베를리오즈, 장차 사위가 되는 바그너, 동화 작가 안데르센 등과 교류를 하였다. 그 무렵 리스트는 파리의 유명한 정치인인 생크릭 백작의 딸인 캐롤라인(Caroline de Saint-Cricq)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백작은 앞날이 불투명한 가난한 음악가라는 이유로 딸과의 교제를 반대하였고, 결국 리스트는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한동안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여 연주 및 작곡을 중단하고 급기야 가톨릭 신부가 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단념하게 된다.

 

22살이 된 리스트는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 결별의 아픔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6살 연상의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첫사랑의 상처가 치유된다. 두 사람은 사회적인 체면, 가족, 부와 명예를 모두 저버린 채 사랑의 도피행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 후 약 9년 동안 동거 생활을 하면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마리 다구는 리스트와 음악관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끝을 맺는다.

 

1832년 4월 20일, 리스트는 니콜로 파가니니에 의해 개최된 파리 콜레라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관람한 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에서 거장이었던 것처럼 자기가 피아노에서 거장이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몇몇 연주자들이 "세 손 연주 효과"나 옥타브처럼 피아노 연주 기술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커스의 날아다니는 ‘공중그네 학파’라고 불리며 피아노 기법의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들 중 일부를 해결하여 연주 수준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이고 있었다. 리스트는 그때부터 매일 피아노 연습을 10시간씩 하면서 실력을 키웠는데, 파리에 모여있던 피아니스트들 중 리스트가 가장 완성된 테크닉의 진수를 보였다.

 

리스트는 Recital(낭송하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피아노 악기 혼자만의 독주회를 처음 개최하였고, 최초로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등 현란한 피아노 기교와 잘생긴 외모로 수많은 여성에게 현재 아이돌과 같은 ‘팬덤(fandom)’을 형성하였다. 쇼맨십이 강한 화려한 퍼포먼스로 그의 연주를 듣고는 기절한 여성들도 있을 정도였는데, 리스트가 연주를 끝내면 예쁘고 젊은 여자들뿐만 아니라 귀족 신분인 노(老) 부인들까지도 일제히 일어나 꽃이나 보석 등을 무대로 던졌고, 리스트가 마차를 타고 도시를 떠날 때면 수 십 대의 마차가 그 뒤를 쫓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 군중을 헤치며 지나가는 리스트의 머리채를 잡아서 머리카락을 뽑아 간직하거나 리스트의 옷을 잡아당겨 찢어졌으며, 리스트에게 머리카락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자기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갈색 강아지의 털을 보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때 유행어가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인데,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여겨지는 프란츠 리스트의 광적인 팬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리스트의 지인이기도 했던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이다. 이 유행어는 하이네가 두 명의 헝가리의 백작 부인이 리스트가 손수건을 떨어뜨리자 잽싸게 붙잡기 위해 땅바닥으로 몸을 내던져 피가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목격한 후에 신조어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삶을 살던 중 리스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846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진지하게 만났던 여인이 있었는데, 6살 연하의 러시안 공주 캐롤라인 비트겐슈타인(Carolyne von Sayn-Wittgenstein)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어릴 적부터 종교에 심취했었던 리스트와 잘 맞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약 15년간 친구이자 연인으로 지냈다. 그녀는 35살의 리스트에게 “명성도 충분히 얻었고, 나이도 있으니 이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후학 양성과 작곡에 전념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진심 어린 충고에 따라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제안한 궁정 악장직을 맡게 되었고, 수백 개의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하며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수많은 걸작을 작곡하는 등 본격적으로 안정적인 음악인의 삶을 살게 된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정략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애정없이 살았지만, 리스트와 교제하는 기간에 이혼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바이마르에 와서 결혼을 위해 비트겐슈타인 공작과의 이혼이 합법화되기까지 긴 세월을 기다리게 된다. 1894년,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세상을 떠나고, 드디어 이혼이 성립되어 리스트와 캐롤라인의 결혼이 성립되려는 찰나, 가톨릭교회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 결혼하기 위해 투쟁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게 된다. 그즈음 마리 다구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셋째 아이까지 사망하고 연이은 불행을 견디지 못한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악장직을 사임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로마로 옮겨간 리스트는 1865년 결국은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1876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리스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1886년 7월 31일 그는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최후 연주 여행을 가던 도중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 실패한 이후에 유부녀들과 연애를 한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의 삶의 방향은 전환되어 연주자에서 작곡가로 살아가는 숭고한 노년의 음악가로서 살게 된다.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리스트의 음악을 피아니스트나 음악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인간 리스트가 화려한 음악가의 삶 뒤편에서 느꼈던 사랑과 환희 그리고 고뇌를 극복하는 과정이 음악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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