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신 음악칼럼] ‘오페라 작곡가’이자 ‘요리사’ 투잡을 가진 “롯시니”

김명신 | 기사입력 2024/09/24 [17:39]

[김명신 음악칼럼] ‘오페라 작곡가’이자 ‘요리사’ 투잡을 가진 “롯시니”

김명신 | 입력 : 2024/09/24 [17:39]

▲ 김명신 수원시음악협회 회장  ©수원화성신문

 

과거 유럽에서 클래식 음악 유명 작곡가들 가운데 바흐(J. S. Bach, 1685~1750)는 20명 자녀 양육을 위해 작품을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오르간 조율사로도 다녔으며, 슈베르트(F. Schubert, 1797~1828)는 작곡 외에 적성에 맞지 않은 교사를 하면서 투잡(two job)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18세기, 19세기 천재 음악가들은 현대 시대와 마찬가지로 불확실하고 생존 경쟁의 환경이 스트레스 자체였다. 그들은 가난, 고뇌, 철학적 몽상과 같은 공통적인 마인드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상적인 예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형이 보편화되어 있어서 많은 경우 40세를 못 넘기고 단명했다.

 

반면에 롯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이탈리아, 1792~1868)는 젊은 시절에 큰 부를 축적한 부자 작곡가로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37살에 오페라 작곡가를 은퇴하고 유명 요리사로 활동하면서, 후반기 39년 동안 편안하게 즐기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도니체티, 벨리니와 더불어 19세기 전반의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인데, 음악 양식은 대체로 낭만기를 예견하는 음악 수법이 많이 나타난다. 즉, 성악가가 악기처럼 표준화된 역할을 담당했던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서 독창자가 주목받을 수 있는 ‘벨칸토(bel canto-아름다운 노래)’ 창법을 개발하였다. 또한, 고전시대의 작법에 충실했던 작곡가로서 생전에는 동시대에 활동한 베토벤보다 더한 명성을 누렸다.

 

그가 마지막 오페라 <윌리엄 텔>을 작곡한 이후 작품활동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먹는 일이 더욱 즐겁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농담했는데, 실제 이유는 1820년대가 지나면서 그의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처럼 벨칸토 창법에 충실한 가수들이 점점 사라졌던 것이 그가 오페라계를 떠나게 만든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특한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으며, 요리 얘기가 나오면 요리사들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매우 수다스러웠고, 미식가를 넘어 대식가로 노는 것을 좋아해서 낙천적이지만 게으른 성격이었다. 작품 의뢰가 들어와도 술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노는 것에 열중하다가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그제야 작곡을 시작해 대충 예전에 만들어 놨던 작품들을 모방하기도 하고, 영리한 두뇌로 집중해서 단시간 내에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오페라 작품들 대부분은 유쾌한 희극으로 작곡되었다. 보마르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비꼰 것으로 유명한 곡이다. 그는 관객들의 니즈를 정확히 간파하는 흥행사의 기질이 있었다. 과거 권력자인 왕과 귀족 교황 등의 요구로 의식과 유흥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하인이던 작곡가들과 달리 롯시니는 엄연한 프리랜서 작곡가였으며, 이러한 삶이 작곡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이 그의 오페라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세빌리아 이발사>는 당시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롯시니가 큰 부를 축적한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은 파리 근교의 ‘파시’라는 곳이었다. 그는 단지 미식을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는데, 롯시니의 살롱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음악인과 문인들을 수없이 많이 대접했다고 한다. 그와 어울렸던 명사들은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해, 리스트, 바그너, 생상스, 베르디 등이 있다.

 

그는 송로버섯이라고 불리는 '트러플'을 열렬히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개발한 메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 위에 생 프와그라(거위간)가 올려진 송로버섯 요리 ‘투르느도 로시니’(’롯시니 스테이크’라고도 함)이다. 롯시니의 송로버섯 사랑은 평생 세 번 울었다고 하는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오페라 데뷔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 초연날 관객들이 난동을 부려 공연이 엉망이 되고 말았을 때이었고, 두 번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동했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센 강에 뱃놀이하러 가서 거위간을 듬뿍 올린 트러플(송로버섯) 칠면조 요리를 물에 빠뜨렸을 때이다.

 

사실, 롯시니는 가난한 호른 연주자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밑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자랐다. 그가 12살부터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도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세에 정식으로 음악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3년 후 <혼인 계약>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흥행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한 삶이 펼쳐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긍정 마인드와 호탕한 성격이었고, 어떤 작품이든지 무리한 시도는 진정한 창의성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작품의 기획과 개발뿐만 아니라 성과 창출의 메카니즘에서도 직관을 발휘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생 전반은 오페라의 성공으로 부를 얻었고, 후반은 오페라 대신 주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며 남은 생을 멋있게 지내면서 인생을 풍요롭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 행복한 작곡가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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