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별미 중 하나인 ‘냉면의 계절’이 돌아왔다. 식당마다 메뉴판에 ‘냉면 개시’라는 글귀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여름 무더위를 조금이나마 날려버리기 위해 너나없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시원한 냉면을 찾는다. 하지만 제대로 된 냉면을 하는 음식점은 매우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보니 대한민국 냉면의 원조인 ‘평양냉면’이 겨울철 별미이고 육수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 너무 찬 육수는 금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제대로 된 우리나라 냉면 맛을 찾을 수 있을까?
▲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정선영 대표와 김성섭 면장
경기도 수원시에 제대로 된 ‘평양냉면’집이 생겼다. 수원시청역 6번 출구 방향에서 수원시청과 홈플러스 동수원점 사잇길로 조금만 걸으면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고깃집이 눈에 들어온다.
음식점 건물에 ‘평양냉면’을 홍보하는 커다란 플랜카드가 여러 개 걸려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평양냉면 제작소’라고 명명된 작은 주방이 있다. 분틀이 한편에 있고 선반에는 냉면 그릇들이 즐비하다. 냉면에 얹는 고명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육수를 담은 냉장고가 그 옆을 차지하고 있다.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윤동훈(47)대표와 그의 부인 정선영(46)부부 대표는 “‘평양냉면’ 맛을 아는 분들은 한번 오셔서 맛을 봐 달라”며 자신에 넘쳐 말했다. “수원에는 없는 맛”이라고도 했다.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는 문을 연 지 4년 정도 됐다. 많은 사람들이 냉면집보다는 고깃집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난 4월 13일 ‘평양냉면 제작소’를 차리고 수원에서 ‘평양냉면’ 시대를 열었다. 1~2층을 합쳐 150여 평 규모다. 1층은 80여 평 규모로 테이블이 놓여 있고 2층은 70여 평 규모로 편하게 앉아서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평양냉면을 선택한 이유… “평양냉면이 좋아서”
윤 부부 대표가 평양냉면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평양냉면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수원은 120만의 거대한 도시다. 그럼에도 평양냉면을 제대로 하는 곳이 없었다. 특히 평양냉면 맛을 아는 7~80대 어르신들의 입맛을 충족시킬 만한 곳이 없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평양은 서북부의 문화·경제의 중심지로 들이 넓어 밭곡식이 많이 나며 황해에 면하여서 어물도 많고 과일도 풍성하여 먹는 것을 즐기는 고장이다. 음식은 양념을 적게 하여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은 담백미(淡白味)를 즐긴다. 이러한 풍토에서 완성된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찬 냉면 육수에 말아먹는다.
영하 20℃ 내외의 강추위 속에서 뜨거운 온돌방에 앉아 몸을 녹여가며 이가 시린 찬 냉면을 먹는 것은 이냉치냉의 묘미가 있다. ‘동국세시기’에도 냉면을 겨울철 시식으로 꼽으며 서북의 것이 최고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지방에서 즐기던 냉면은 6.25사변 이후 월남민에 의하여 전국에 퍼지게 되어 사계절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대한민국 냉면의 원조는 ‘평양냉면’이라고 할 수 있다.
윤 대표가 평양냉면을 내기로 작정했지만, 준비과정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평양냉면 제작소’를 내는데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학원을 다녔다. 평양 출신인 탈북자들에게서 평양음식에 관한 강좌를 들으며 평양냉면의 기초를 다졌다. 평양냉면으로 소문난 면장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공부도 하며 기술을 이전 받았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니 직접 평양에 가 평양냉면을 맛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북한에서 운영하는 평양식당을 찾아가 평양냉면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돈도 꽤 많이 들었다. 윤 대표가 아직은 직접 평양냉면을 내올 정도의 실력은 안 된다. 여전히 배우고 있고 수련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하지만 최소한 평양냉면의 A에서 Z까지, 모든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다.
‘평양냉면 40년’ 김성섭 면장을 만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윤 대표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일까? 그의 앞에 김성섭(57) 면장이 나타났다. 김 면장은 평양냉면으로 잔뼈가 굵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팍팍한 시절, 17살의 어린 나이에 수원 영동시장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남포면옥에서 평양냉면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냉면집들을 두루 거쳤다. 그렇게 김 면장은 무려 40년 세월을 평양냉면과 동고동락했다.
특히 지금은 작고한 가수 현인과 김정구 선생이 김 면장의 평양냉면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양반들은 제가 하는 평양냉면집을 쫓아다닐 정도로 미식가였습니다. 평양냉면 마니아였죠.” 현인 선생은 비빔냉면을, 김정구 선생은 물냉면을 좋아했다고 한다.
“평양냉면을 빼는 방식은 여러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이북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통 평양냉면 스타일을 고집합니다. 담백하게 하는 스타일이죠. 그런 평양냉면 맛을 고집해 왔습니다.”
김 면장의 40년 고집이 담긴 평양냉면을 뽑는 철학이다. 그는 “평양냉면을 제대로 하는 집이 거의 없다”고 했다. 평양냉면에 대해 설명을 해 줘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집 평양냉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요”
김 면장 특유의 평양냉면 맛의 비법은 무엇일까? 먼저 면부터가 특별하다. “우리집 평양냉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요.” 제분소에 특별히 부탁을 해서 메밀을 많이 넣었다는 것. 동의보감에는 메밀이 비위장의 습기와 열기를 없애주며 염증을 가라앉히고 배변을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나와 있다. 또한 메밀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고 기억력을 좋게 하여 각종 성인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도 기록돼 있다.
반죽을 하고 분틀에서 면을 뽑는 과정은 당연히 김 면장의 몫이다. 면을 뽑아 적당량을 그릇에 담고 평양냉면 육수를 붓고 면 위에 얇게 썰은 무와 배, 삶은 계란, 편육 등 고명을 얹으면 비로소 평양냉면이 완성된다.
평양냉면 육수를 만드는 데는 오로지 ‘한우’만을 쓰고 있다. 한우 뒷다리 바깥쪽 부분에 있는 부위인 설깃을 고아 육수를 낸다. 육수를 내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침 9시부터 대략 7시간 정도이니 거의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봐야 한다. 일일이 기름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간장이 들어가는데 간장 냄새를 제거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육수에다 동치미 국물을 섞어 평양냉면 국물을 만든다. 이제 동치미 육수 내오기 위해 동치미를 담가야 한다. 여기에서 김 면장은 굳게 입을 닫았다. 동치미를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기도 한데다 동치미 국물 맛이 결정적으로 평양냉면 육수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알려주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평양냉면 육수 맛은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어떠한 비율로 섞느냐도 관건이다. 이 역시 김 면장만의 비법이 있다. 다시 말해 며느리도 모른다는 말씀.
진짜배기 평양냉면, 첫 맛은 ‘심심하다’
이제 평양냉면 맛을 볼 차례다. 결국 평양냉면 육수 내는 비법은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일단 먹어 보면 ‘이 맛이 평양냉면 맛이구나!’ 정도는 알고 가는 셈이니 억울할 것도 없다. 설사 평양냉면 육수 내는 비법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김 면장의 40년 손맛이야 어떻게 따라갈 소냐?
그나마 금강산 관광을 두 차례 다녀오면서 옥류관에서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먹어본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어 나름 비교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시 평양냉면의 첫 맛은 ‘심심하다’는 기억이다. 무슨 맛이라고 느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갖가지 조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이니 말해 무엇하랴.
드디어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평양냉면’이 눈앞에 차려졌다. 진한 금빛이 도는 큼지막한 유기에 적당량의 냉면 육수가 담기고 그 중간에 면이 똬리 모양으로 들어앉았다. 그 위엔 얇게 썬 무와 배, 편육, 삶은 계란 반쪽이 놓여 있다.
윤 부부 대표가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설명했다. 먼저 냉면은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고 평양냉면 육수 맛을 음미하는 것이 좋단다. 평양냉면 맛의 진수를 느끼려면 그냥 먹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보통 냉면을 먹을 때 식초나 겨자를 적당히 치고 무조건 면을 풀어 말아먹는데, 역시 아니었던 것이다.
평양냉면 육수 맛이 약간 진한데 면을 휘휘 저어 먼저 풀어내면 육수 맛이 약간 연해지며 제대로 된 평양냉면만의 육수 맛을 느낄 수 있다. 식초는 면을 한 젓가락씩 뜰 때마다 면 위에 살짝 뿌려 준다. 겨자는 고명을 먹을 때 그 위에 살짝 쳐 준다.
주성분이 메밀이기에 면은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먹는데 면을 가위질했다가는 무식하다는 소릴 들을 수 있다.
고기 먹은 후 평양냉면, 진정한 ‘선육후면’ 완성
냉면은 고기를 먹고 난 후 후식으로 많이들 먹는다. 평양냉면 역시 맛있는 고기를 먹은 후 마무리로 시켜 먹으면 진정한 ‘선육후면’이 완성된다.
윤 부부 대표의 말대로 육수에 면을 풀어 한 입 베어 물으니 평양냉면 특유의 육수 맛이 혀끝에 전해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마디로 ‘심심하다’.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기억 속에 남아있는 금강산 옥류관의 그 맛이다. 윤 대표의 집념과 김 면장의 고집이 만나 ‘평양냉면’의 본 맛을 되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김 면장은 “냉면 육수 맛은 어떤 때는 심심하고 어떤 때는 달달하고 하면 안된다. 평양냉면 특유의 육수 맛을 늘상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고 어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집 냉면 육수 맛이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입맛이 바뀐 것이지 우리집 냉면 육수 맛이 바뀐 것이 아니”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똬리 모양의 면은 젓가락으로 2~3번 휘휘 저으니 금새 풀어졌다. 한 입 베어 문 면 또한 질기지 않고 그냥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다. 메밀 함량이 높다는 김 면장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면을 한 입 한 입 먹으며 가끔씩 육수를 들이키며 맛을 음미했다. 쇠고기 고명도 한우라 그런지 질기지 않고 부드럽게 씹혔다. 마무리는 남은 평양냉면 육수를 깨끗하게 비우는 것으로 했다. 역시 심심하면서도 시원한 특유의 평양냉면 육수 맛의 여운이 입안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맛보았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숱하게 먹었던 여름철 별미 냉면이 모두 짝퉁냉면(?)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평양냉면이야 말로 빨리빨리를 외치고 편한 것만을 찾는 요즘 같은 초스피드 시대의 희생물인 것이다.
“평양냉면 먹고 싶네”… 수원에도 ‘평양냉면’이 있어요!
윤 부부 대표는 “만약 ‘평양냉면’이 특화된다면 냉면만을 가지고 ‘평양냉면 전문점’을 내 볼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평양냉면을 전국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체인점 모집도 계획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일단 이곳 수원에도 ‘평양냉면’이 있다는 것을 많이 알려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불현듯 노래 한 곡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대한민국의 블루스 뮤지션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은 1집 앨범 ‘씨 없는 수박’의 ‘300/30’에서 평양냉면을 후렴구에 넣었다. 그 후렴구는 ‘평양냉면 먹고 싶네’.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평양냉면’이 말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진짜배기 '평양냉면‘의 위상을 떨치길 기대해 본다.
위풍당당 수원 화로구이 ‘평양냉면 제작소’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043-8(수원시청역 6번 출구 방향)
031-898-8592/8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