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유평(大有坪)에서 시작한 조선식 민주주의
김준혁 | 입력 : 2020/04/09 [16:15]
우리식 민주주의 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약간의 도발적 질문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민주주의 제도가 서구에서 들어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가 무조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여 정착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중의 하나가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미국 등 서구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동학 혁명 과정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이 바로 집강소 설치와 운영이었다.
시장과 도지사 등 광역자지단체장과 시장과 군수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시민들이 직접 선발하는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는 12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정과 협의하여 진행된 집강소 설치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조정에서 국왕에 의해 임명된 수령들에 의해 통치되던 현실에서 백성들이 직접 고을의 지도자를 뽑아 ‘집강(執綱)’으로 명명하여 그들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면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이와 같은 동학의 집강소보다 더욱 앞서서 민주주의적 기반을 마련하고 운영되었던 것이 바로 수원 화성의 북쪽 들녘인 ‘대유평’에서 마련된 운영 제도였다. 정조는 1795년 윤2월에 화성행차를 추진하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한양의 궁궐에서 하지 않고 수원의 화성행궁에서 치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위해 왕실 소유의 내탕금 10만 냥을 내어 놓았고, 혜경궁의 회갑을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기구인 ‘정리소(整理所)’에서 경비를 아껴 2만 냥을 남겼다. 정조는 이중 1만냥을 제주도민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 구입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1만 냥은 화성의 북쪽에 저수지를 만들고 백성들을 위한 국영농장을 만들기로 하였다. 저수지의 이름을 만석거라고 하고 국영농장의 이름을 대유둔, 혹은 대유평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몇 십만평에 이르는 대유둔을 운영하기 위하여 ‘대유둔도감(大有屯都監)’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대유둔도감’의 최고 책임자는 ‘둔도감’이라고 하여 화성에 거주하는 양반 중에서 1인을 화성유수가 임명하게 하였다. 둔도감을 돕는 대유둔 부책임자인 ‘도감’은 화성에 주둔하는 장용영외영의 장교 중 한명을 역시 화성유수가 임명하게 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실제 대유둔을 운영하는 주체인 ‘마름’의 선발이었다. 앞서 둔도감과 도감은 양반과 장교 중에서 화성유수가 임명하는데, 마름은 선발 방식이 전혀 달랐다. 정조는 화성의 대유둔 마름을 대유둔에서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직접 의견을 모아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게 하였다.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들이 직접 운영 주체를 선발하게 한 것이다. 화성유수가 자신의 측근을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특별한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케 한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민주주의 제도의 운영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이들에 대한 임금 체계다. 정조는 이들에 대한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지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양반인 둔도감에게는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하고, 장교인 도감에게도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하였다. 그런데 마름에게는 매달 쌀 2가마를 지급하게 하였다. 양반과 장교에게 지급하는 급여보다 배나 되는 쌀을 지급하게 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지금도 국가의 중요 기관에서 위원장에게 높은 임금과 판공비를 지불하는 것이 관례가 아닌가? 실제 일을 하는 사람보다 명망과 나이 학벌 등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사회가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200여 년 전 정조는 명망보다도 일을 담당하는 마름에게 더욱 많은 급여를 주었다. 백성들에 의해 추천된 현명한 사람을 더욱 존중하고 그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일을 하게 하여 국영농장인 대유평이 더욱 발전하여 쌀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백성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여 진정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경제민주화가 아닌가? 실질적으로 역할을 하는 일꾼에 대하여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그가 진심으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이다.
대유둔은 민주주의적 시스템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선발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준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백성 존중과 노동에 대한 존중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는 발전할 수 있었다 정조시대 수원의 대유평으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 정신과 기반은 동학으로까지 이어져 집강소 설치라는 엄청난 민주주의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면서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민에 대한 존중을 갖는 제도를 만들어내고 운영을 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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