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우르르 책상에 올라가 교실을 나가는 선생님을 향해 외쳤다. 겸연쩍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스승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엔딩을 알리는 자막이 화면에 가득 찼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렇게 끝났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코끝은 계속 시큰했다. 좀처럼 가라앉질 않던 감격을 누르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격동의 1980년대는 막 저물고 있었다.
영화에서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책상 위로 오르거나 물구나무를 서보라고 가르친다. 그 까닭에 대해 묻자, 스승의 설명은 명쾌했다. “책상에 오르기만 해도 친구들이 다르게 보이고, 교실도 달라 보이고, 세상도 다르게 보인단다.” 단지 책상에 오르기만 했을 뿐인데, 내 키 높이에서만 바라봤던 세상과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는 건 유쾌한 반전이었다. 꼭 어제 본 영화처럼 생생하다.
그때는 딱 그랬다. 6·10 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요원했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막 수습기자 딱지를 뗀 필자에게 당시의 답답했던 현실을 피할 수 있던 유일한 탈출구는 영화 관람이었다. 존 키팅 선생님 역(役)의 로빈 윌리엄스 연기도 물론 일품이었지만, ‘그의 내면에 감춰졌던 고뇌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착각도 그래서 행복했었다.
영화는 19세기 설립된 미국 명문 고교인 웰튼 아카데미의 새 학기 개강식으로 시작된다. 이 학교 출신인 존 키팅 선생님이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카르페 디엠”을 외친다. 파격적 수업방식은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관객들도 명대사들로 인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화 내내 관객들은 모두 존 키팅 선생님의 제자였다.
피터 위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죽은 시인의 사회>는 성장 영화 중 지금까지도 최고 명화로 꼽힌다. 가장 비중이 컸던 로빈 윌리엄스와 에단 호크의 연기가 없었다면 이 같은 평가는 어려웠을 터이다. 존 키팅 선생님 역을 열연했던 로빈 윌리엄스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순수한 학생 토드 역의 에단 호크는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반부에서 학생들은 존 키팅 선생을 ‘캡틴’으로 부르면서 따르고,‘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에 대해서도 소개 받는다. 학생들은 엄격한 학교 규율을 어기고 이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선생님을 통해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따지고 보면 존 키팅 선생님이 들려주고 싶었던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열하지만, 화려한 성공만이 과연 최선일까. 이처럼 진지한 물음에 어른들도 자유로울 순 없을 터이다. 영화를 통해 존 키팅 선생님은 인생철학에 대해 간단명료한 답변을 제시한다.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사실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꼭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의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뭐라고 비웃든 간에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는 명작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옷차림이 촌스럽다고 하더라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만큼이나 많은 명대사들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을까.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들마저도 여운으로 가득 채우는, 그런 영화였다.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더욱 안타깝고도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존 키팅 같은 스승이 꼭 필요한 시대라는 점이다.
존 키팅 선생님 같은 훌륭한 스승은 꼭 감수성 많은 어린 학생들에게만 필요할까. 필자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고 감히 제언한다. 요즘의 정치 상황을 보면 오히려 존 키팅 선생님의 따끔한 지적은 스스로 다 컸다고 자처하는 우리 어른들에게 더욱 절실하다. 진지하고 차분한 토론으로 진행되어도 부족할 판에, 폭력과 무질서로 어지러운 현장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래서 심히 부끄럽다.
생뚱맞겠지만, 시와 정치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시가 따뜻한 가슴으로 풀어내야 할 감성의 영역이라면, 정치는 냉철한 머리로 헤쳐 나가야 할 이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와 정치가 전혀 별개의 사안일 수도 없다. 서양의 현자(賢者)들은 세상의 문제는 감성과 이성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선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정치라고도 했다.
바야흐로 제21대 총선을 1년 정도 앞두고 정치권이 부쩍 분주해지고 있다. 일부 정당의 움직임도 총선을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인지, 정치적인 워딩도 시퍼렇게 날이 서있고, 언어들도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져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모름지기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유권자(有權者)라고 부른다.
정치는 유권자들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려야 하는 영역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푸념한다. “최선(最善)의 후보를 뽑은 게 아니라, 차악(次惡)의 후보를 찍었다”고 말이다. 선거가 끝나고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니 그렇다는 얘기다. 어떤 이들은 그 후보를 찍은 내 손이 너무나 부끄럽다고도 뼈저리게 후회한다. 선거 때는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렇게 눈에 콩깍지가 잔뜩 씌었을까.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 선생님의 따가운 충고처럼, 정치인이라면 모름지기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고, 행동이 있다. 웅크리고 앉아만 있던 어리석음을 떨치고 책상 위로 올라서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국민들의 눈물이 보일 터이다. 그래야 유권자들은 차악(次惡)의 후보가 아니라 최선(最善)의 후보를 뽑을 수 있다. 그래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 답답한 ‘죽은 정치인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허행윤 수원화성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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