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에 나오는 이홍위(단종)의 대사이다. 설 연휴에 역사를 좋아하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볍게 나선 영화관람이었지만 뜻밖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골 역사 드라마 소재인 단종을 다룬 영화로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의 영월 청령포에서의 유배 생활을 독특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담아내고 있다. 다소 진부할 수 있는 단종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지만 ‘왕사남’은 연일 관련 기사를 쏟아내며 흥행몰이 중인데, 개봉 19일차 현재 누적 관객 582만 명을 기록 중이며 조만간 700만 명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배우 유해진(촌장 엄흥도 역)의 연기가 워낙 압도적이었고, 강원도 영월의 오지 산골 마을인 광천골의 촌장이 낙후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중앙의 고위직을 모시기 위한 유배지로 청령포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설정 자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영화 후반부 단종이 광천골의 평범한 백성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고, 단종과 그 주변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기꺼이 목숨까지 대던지는 대목에서는 눈물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영화 자체도 좋았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종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화 ‘왕사남’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단종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조선의 제7대 국왕인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진 세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본인이 직접 정권을 잡기 위해 형제와 수많은 신하를 죽이며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야심이 많고 비정한 군주라는 비판적인 시각이다. 그 당시 기준으로도 도덕성과 명분이 결여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그 즉위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하였다. 반면 왕좌에 오른 이후 조선 왕들을 업적이나 성과 기준으로 평가했을 경우, 국정운영을 안정적으로 운영했고 왕권과 국방을 강화한 능력있는 군주로 태조 이성계에 버금가는 임금으로 숭배를 받았다. 그는 국정운영의 근간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제를 확립했으며, 조선 전기의 각종 제도들을 정비하여 그의 손자 성종 때의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세조의 재위 기간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단종의 복위와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조선 후기 이후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의 ‘비정함’에 초점이 맞춰지며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핵심가치였던 충과 효를 기준으로 비정한 군주에 대한 도덕적 재평가가 이뤄진 것은 다행이지만, 수양대군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법적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왕사남’의 흥행으로 단종과 세조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고 있어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제고되어야 성공한 반역 세력에 대한 불완전한 청산이 쿠데타의 자양분으로 남아있어 이제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을 무시한 불법 쿠데타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과정과 결과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 사회일까? 누구나 과정과 결과 모두 중요하다고 쉽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결과나 성과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정치인의 권력 획득, 기업인의 사업 성공, 개개인의 성공에서 그 지난한 과정보다는 달콤한 성공이라는 결과에만 주목하고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우리 모두에게 내재화되어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사적 영역인 기업이나 개인 차원에서는 과정 부문을 좀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겠지만, 정치나 행정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과정이나 절차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정당은 당선이나 정권 획득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민주적 과정이나 절차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당성이나 명분도 충분히 확보돼야 할 것이다. 성공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이 개인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될 때 우리 사회는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쿠데타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쿠데타에는 우리가 엄격한 법적 처벌과 단호한 대처를 요구해야 한다. 국가폭력으로 점철된 1980년 서울의 봄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대사에 10.26 불법 쿠데타 세력에 대해 엄정한 심판을 가하지 못한 뼈아픈 경험이 있고, 그때 성공한 신군부 반란 세력에 대한 불완전한 청산이 쿠데타의 자양분으로 남아, 12.3 불법 계엄 및 내란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불법 권력 찬탈 과정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감수한 어린 단종이 당연히 사랑했을 우리들에게 얘기해 주고 있다. 이제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헌법을 유린한 불법 쿠데타는 역사박물관으로 사라져야 한다. 나이 어린 단종의 가냘프고 힘없는 하얀 손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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