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거리에 있는 전 국민이 멈춰 섰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태극기가 있을만한 방향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자세를 취하며 애국가를 무조건 들어야 했다. 지금은 80년대 영화에나 나올만한 장면이지만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6시 일시 멈춤’ 조치로 인해 그 당시 불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래 친구들과의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도 무조건 멈춰야 했고, 화장실이 급해도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급한 용무를 참아야만 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어린 마음에 국가에 뭔가 죄를 짓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찜찜함을 견디는 것도 내 개인의 몫이었다. 그 당시에는 필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사정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시민 스스로가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국가가 집단 동원 체제 형태로 시민과 시간을 관리해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됐다. 억지로 국민에게 애국을 강요하고 정권에 대한 충성을 세뇌시킨 그 국민의례의 뿌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술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오전 6시 사이렌이 울릴 때 궁성 요배를 행한 후 라디오 체조를 강제했고, 낮 12시 사이렌이 울리면 멈춰서 정오 묵도를 강요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그 잔재가 살아남아 내 소년기와 사춘기 시절을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괜히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체주의적 국가 통제 이외에도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사소한 목소리는 철저하게 무시되어왔다. 사실 민주주의 발전과 더불어 전체주의적인 통제 기제는 폐지가 되거나 그 강제 강도가 많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집단주의 문화는 사회 저변에 여전히 남아있다. 집단우선주의는 국가 차원은 물론이고 집단 차원에서도 강고한 조직운영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네 사정이고 조직이 먼저지. 어떻게 너는 니만 생각하냐” 속칭 꼰대라는 소리를 딱 듣기 좋은 말이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다. 국가나 조직의 목표가 먼저이고 개인의 사소한 사정은 항상 뒷전이었다. 1970년대 산업화 세대도 조직이 먼저였고, 1980년대 민주화 세대에서도 조직이 먼저였다. 국가 재건, 경제 발전, 민주화, 세계화, 국가 경쟁력 등 이 세상의 큰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는 설자리가 없었다. 대의명분이 늘 먼저였고, 개인의 사소한 사정은 무시되었고 소수는 희생을 강요받았다. 이 세상의 큰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대의명분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 동참하는 개개인의 인권과 자유도 중요하고, 사회적 소수나 약자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국가와 조직을 위해 헌신해온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제 열린 마음으로 우리 모두의 사소하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때가 온 것이다. 최소한 입특막, 타인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는 말자.
전체주의적 통제에 개인의 사소한 사정은 철저하게 무시되어온 사회 세상의 큰 목소리에 저항하는 사소하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는 국가 폭력에도 사소한 저항이 필요해 개인의 사소한 경험과 기억이 독창성의 근간임을 주목해야
어찌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사소한 것이지만, 그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거대한 담론체계가 감안하지 않았거나 다루지 못했다는 의미이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개인적 아픔이나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도 주변 사람이나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주 개인적인 사소한 사정’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은 절박한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불법 계엄과 같은 국가 차원의 반헌법적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집단적 저항이나 투쟁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국가적 폭력이나 집단적 가해 문화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사소하지만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한류문화의 확산이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 출발했듯이, 한 개인의 사소한 사정으로부터 이 시대의 난제들을 풀어낼 해결책을 찾아보자. 개인의 사소한 경험과 기억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독창성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그 사소한 사정에 관심을 가져보자. 이제 주변 사람의 사소한 사정이 무엇인지 나부터 먼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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