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칼럼] 수원의 회화나무 이야기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2
회화나무(槐花樹)는 콩과에 속하는 교목으로, 학자와 선비의 절개와 지혜를 상징하는 나무다. 이름은 한자명 ‘槐花(괴화)’를 중국식으로 읽은 ‘회화’에서 유래했으며, 회화나무 외에도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충청도에서는 ‘호야나무’라 불렸는데, 서산 해미읍성의 호야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철사에 결박되어 고문을 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회화나무는 집안에 심으면 큰 학자가 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길상목(吉祥木)과 학자수(scholar tree)로 여겨졌으며, 잡귀를 물리친다고 알려져 궁궐이나 사대부가에 많이 심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화나무 수형은 곧지 않고 굽어 있으며, 잎은 아까시나무와 닮아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1766년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집안의 나무심기」 편에는 “회화나무를 중문에 심으면 3대가 부귀한다. 일설에 집 앞에 심으면 크게 길하다고 하였다. 또 신방(申方, 남서쪽)에 심으면 도적을 피하므로 길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송사(宋史) 왕단전(王旦傳)』에는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던 왕호(王祜)가 일찍이 자기 마당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 후일 자기 자손 중에 반드시 삼정승의 자리에 오를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의 아들 왕단(王旦)이 명상(名相)으로 18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를 누리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회화나무는 정승을 상징하는 나무로, 또는 학자를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궁궐과 서원, 향교, 사대부가 등에 많이 심기게 된다.
수원에서 나이 많은 회화나무는 화서2동에 있는 노거수가 유일하다. 현재는 화양초등학교 북쪽, 길 건너편 모퉁이 제16호 소공원에 이식되어 있다. 원래는 주변 아파트 개발 전 고양골 동래 정(鄭)씨 집성촌의 자연마을에 있었으나, 2007년 아파트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높이는 약 13m, 가슴높이 둘레는 4.1m이며 수령은 450년으로 추정된다. 보호수로서 보존 가치가 크지만, 이식된 수목이기에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는 대부분 전설을 간직한다. 화서2동 회화나무 역시 전설이 전해진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이 나무 아래에서 혼인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청년은 의병으로 나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청년은 살아남으려 애썼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여인은 매일같이 나무 아래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여인을 겁탈하려 했으나, 나무 구멍 속에서 황구렁이가 나타나 여인을 구했다. 여인이 혼절하자 구렁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회화나무줄기 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8.15 해방과 6.25 전쟁 때에도 황구렁이가 나무 주변을 맴돌았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해마다 나무 아래에 볏짚으로 만든 터주가리를 설치하고 떡을 올리며 제사를 지냈다.
화서2동 회화나무는 현재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다만 줄기 일부가 부후 되어 외과수술을 받았으나 틈이 벌어지고 틀어져 있다. 나무줄기는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굵은 두 가지는 양팔을 벌린 듯한 형상으로 마치 축제장의 바람인형을 연상시킨다. 지금은 마을의 제사 등과 같은 보전 활동은 없어 안내판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회화나무와 관련된 이야기 중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도 있다. 바로 정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다. 현재 창경궁에 가면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본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나무는 1762년(영조 38년), 조선 왕실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을 지켜본 산 증인이다. 그해 윤 5월 13일,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의 비행을 문제 삼아 창경궁 문정전 앞마당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한여름 무더위 속, 좁은 뒤주에 갇힌 세자는 목마름과 굶주림을 견디다 탈출을 시도했으나 붙잡혀 다시 뒤주에 갇히게 된다. 영조는 뒤주를 옮겨 창경궁 선인문 앞 회화나무 옆에 놓게 하고 잔디와 밧줄로 단단히 덮게 했다.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회화나무는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벼락을 맞은 듯 줄기는 갈라지고 속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다. 가느다란 지팡이 같은 지주대에 의지한 채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다.
임오화변 당시 어린 정조는 부친을 살려 달라고 뒤주를 부둥켜안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정조는 부친의 죽음을 뼈저리게 아파하며, 사도세자를 위한 효를 다하고자 했다. 현재의 수원 화성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며 살고자 건설한 신도시다. 즉, 사도세자의 흉사가 현재의 수원을 있게 한 것이다. 창경궁 선인문 앞 회화나무에 대한 정조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이 회화나무를 정조는 살아생전에 잊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의 회화나무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 못지않게 회화나무 녹병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는 모든 회화나무가 이미 감염되었거나 감염에 노출된 상태다. 수원시는 공원이나 가로수 조성 시 회화나무를 제외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회화나무 녹병에 대한 예방이나 치료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조상들이 학자의 나무로 여겨 즐겨 심고, 우리 역사와 함께해 온 회화나무가 지금은 병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산림 당국의 방제 대책이 마련되기를 바라며, 언젠가 도시 속에서 존중받는 회화나무가 사람들과 공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프로필 - 수원특례시 공원녹지사업소장 - 조경기술사 - 자연환경관리기술사 -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 문화재수리기술자(식물) - 나무의사, 수목보호기술자 - 경기도시공사 기술자문위원 - 조달청 평가위원 - 왕의정원 수원화성(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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