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는 서기 617년(진평왕 39)에 출생하여 686년 (신문왕 6)에 입적하신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명한 스님 중 한 분입니다. 삼국통일이 676년이니 원효대사는 통일신라시대에도 10년간 활약한 인물입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서울의 원효로 등으로 이름을 기리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함께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에 유학길을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고 합니다. 동두천시 소재 소요산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연이 담긴 현장이 있습니다. 소요산 정상 봉우리 중에는 의상대가 있으니 원효와 의상은 경기도에서 많은 역사를 남겼던 것입니다.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중에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른바 '오도처'가 화성시 남양면 당항성 인근에 있다는 것이 학계의 비중 있는 의견이라고 합니다. 지인을 만나서 장시간 자료를 공유하고 최근까지 학계에서 논의하고 검토한 바를 살펴보고 큰 공감을 했습니다. 학술단체의 의견을 보면 1971년에 사적 제217호로 지정받은 당항성 백곡리 고분 중에서 어느 한 곳이 바로 원효대사께서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평택 수도사가 원효 체험관을 건립하였고 원효의 ‘득도처’가 화성시와 평택시로 양분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다수의 학자들이 화성시 당항성이 원효의 득도처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1360년 전의 역사가 화성시 역사에서 평택시 역사로 넘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화성시의 소중한 역사가 사라질 것만 같은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다 함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확인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전해 내려온 원효대사 역사 이야기를 단순한 행정적 처리로 마감할 수는 없습니다. 1360년 전 화성시 당항성에서 있었던 원효대사의 역사적인 이야기는 앞으로 1천 년 이상 이어갈 역사적인 사안입니다.
화성시의 역사로 존재하는 원효대사의 ‘오도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구체화하기 위해 관계 기관을 방문하여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전면에 나서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미미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평택시의 예산 투자와 적극적인 활동에 밀려서 화성시의 ‘오도처’가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합니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신 686년으로 계산하면 1337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니 매년 학술회의를 열고 학자들이 연구한 바를 발표해도 역사적인 내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적극적인 평택시의 예산 공세에 밀려서 진정한 화성시의 역사적 사실이 훼손되는 것인가 하는 우려를 합니다.
지금도, 오늘도 다수의 학자들이 화성시의 원효대사 ‘오도처’를 인정하는 상황이지만 다수의 공무원과 문화재 관계자들이 원효대사의 ‘오도처’에 대하여 평택지역으로 몸을 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몇 년 새에 바꿀 수는 없다고 봅니다. 최근 수년 동안 역사적인 혼선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루빨리 원효대사의 ‘오도처’에 대한 역사인식이 제 자리로 돌아오도록 학계, 행정, 언론, 의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 ⓒ 수원화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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